■ 곤혹스러운 정부 경제팀 소비 투자 고용 등 실물지표는 아직 냉랭 설익은 바닥론 확산에 자산시장 버블 조짐도 국내 증시와 부동산 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악화 일로로 치닫던 경제지표 중에도 간간이 긍정적인 신호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 경제팀 수장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고민은 오히려 깊어지는 모습이다. 악재(惡材) 일색이던 2월 초 취임 직후와 달리 최근에는 좋은 소식도 가끔 들리는데 윤 장관의 말수는 더 줄어들었고 발언도 조심스러워졌다.

윤 장관은 20일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공존하는 것이 현 상황이기 때문에 미래를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2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 문제를 굉장히 워치(예의주시)해야 할 시점”이라며 유동성 과잉이 초래할 부작용을 걱정했다.

윤 장관이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던 일부 경제지표가 당국의 유동성 공급과 주요 기업의 실적 개선 등에 힘입어 나아지고 있지만 소비와 투자, 고용 등 핵심 실물경제 지표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물 경기는 여전히 한겨울인데 자산시장에 돈이 몰려 거품 우려가 나오고, 여기에 설익은 ‘경기 바닥론’까지 돌출하면서 경제운용 방향에 대한 그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 유동성의 위력에 주춤한 정부 경제팀 최근 전년 동월 대비 광공업 생산 감소 폭이 둔화되고 서비스 생산이 플러스로 반전되는 등 경기하강 속도가 주춤해졌음을 알리는 징후가 나타난 것은 비관론 일색이던 한국 경제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소식이다. 하지만 시중에 넘쳐나는 돈이 기업의 투자나 생산 활동 쪽으로 흐르지 않고 증시와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몰리면서 거품이 형성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당국으로선 곤혹스러운 대목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지난해 10월 5.25%였던 기준금리를 올해 2월 2.0%까지 내리면서 유동성 공급을 크게 늘렸지만 소비와 설비투자는 여전히 위축된 상태다. 2월 소비재판매와 설비투자는 1년 전보다 각각 6.2%, 21.2% 감소했고 일자리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4개월 연속 줄어들면서 ‘실업자 100만 명 시대’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실물경제의 한파(寒波)는 기업 자금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우량기업이 발행하는 AA등급 회사채 금리가 이달 들어 0.5%포인트 안팎 떨어졌을 뿐 대부분의 제조업체가 발행하는 BBB등급 회사채 금리는 거의 변화가 없다. 회사채 발행 때 기준으로 삼는 국고채 3년물 금리와의 격차도 일부 대기업이 발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좁혀지지 않았다. 당국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정작 기업들은 직접 금융시장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당혹감은 윤 장관의 최근 발언에도 묻어나고 있다. 그는 1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시중에 풀려 있는) 800조 원은 분명 과잉 유동성”이라고 단언했다. 22일 기자간담회에선 “과잉 유동성 문제는 통계를 보는 흐름과 시각에 따라 숫자는 좀 다를 수 있지만 예의주시하고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경기가 살아나기도 전에 자산시장에 거품이 낄 경우 추가적인 경기부양책을 추진할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도 윤 장관의 고민이다. 경기부양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추진한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폐지, 민간주택 분양가상한제 폐지, 서울 강남 3구 투기지역 해제 같은 부동산 대책이 정치권의 반발에 부닥쳐 표류하는 것도 자산 거품 우려와 무관치 않다는 게 재정부 안팎의 시각이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풍부해진 유동성이 수익이 낮은 은행의 상품보다 투자 매력이 있어 보이는 부동산과 증시로 몰리고 있다”며 “경기침체가 생각보다 더 길어지거나 해외에서 추가 금융부실이 발생하면 과잉 유동성에 따른 거품은 곧바로 붕괴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금융권이나 기업이 긴장을 풀고 구조조정 속도를 고의로 늦추거나 부유층이 해외소비를 늘려 경상수지에 부담을 줄 가능성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 자금시장 불확실성 해소가 관건 최근의 경기흐름에 신중함을 보이는 것은 재정부 당국자들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전문가는 현 경기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24일 발표될 한국은행의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속보치와 다음 달 나올 3월 산업활동 및 4월 고용동향 지표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설 연휴 등 휴일이 많은 1, 2월 경제지표만 놓고 경기를 판단할 경우 상황을 오판(誤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재정부 당국자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처지에서 세계 경제가 호전되지 않은 채 ‘나 홀로’ 좋아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세계 경제 여건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경기회복 시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의 무역의존도(GDP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는 2007년 69.4%에서 지난해 92.3%로 치솟으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만큼 해외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다. 윤 장관이 지난주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세계 경기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지 않아 긴 호흡으로 앞날을 맞아야 한다”며 ‘경기바닥론’을 경계하고 나선 것은 ‘어려울수록 국민이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황인성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금은 지나친 비관론이나 낙관론에 쏠려 그릇된 경기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할 때”라며 “시중 자금이 생산적인 부문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속도를 높여 자금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Posted by 참어렵네